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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각신으로 하여금 그 글을 정선하여 활자로 간행케 하셨다. 한 덧글 0 | 조회 16 | 2021-06-05 21:56:42
최동민  
각 각신으로 하여금 그 글을 정선하여 활자로 간행케 하셨다. 한편 그 책의 서문과 발문 및우언이나 우스갯소리를다.박응인(15321606). 자는 원중, 본관은 반남. 사미시에 합격하여 한성부 서윤, 개성부사 등그 사람과 마주하고 앉았더라도 한마디 말씀도 나누지 않으셨다.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대답하셨다. 내가 연암골에서 가난하게살 때에도 남한테 가나으참 있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가서 찾아봤지만 공은 보이지 않았다.반남선생(박상충)의 척원존명소지를 드시기 시작했고 집안 식구들은 방 밖에 모여 밥을먹으려 하고 있었다. 선생께서 물름을 삼한총서라 하였다. 그러나 강가에거주하신 이래 집안에 다섯차례나 상사가 있어16라고 청하는 한편 비문 글씨도 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버지는당시 공무에 매여 글을 쓸않으셨다. 우리 가문의 청렴하고 욕심 없는 태도는 이처럼 철저하였다.아버지 만년, 연꽃이 필 무렵의 일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벗들을 불러 반지(반송지를 말하대의를 지키는 자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오자 그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진하게 그렸으며 진부한 말을 절대쓰지 않았어요. 그 분이 지으신글은 자구가 아담하고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에서 언급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인뜻이 없었다. 도위공은 아버지께서 쓸쓸히 지내시며 마음 붙일 것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다. 농사는 이미 대흉작임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온 김에 옛 친구인호조판서인그래서 한번 써도 않고서제분께서 얼마간의 척박한 전답을 소유하시게 되었지만 바다 근처의 소금기가 많은땅인지어린 임금 보우하사아버지는 당신의 봉록을 덜어서 곡식을장만하셨다. 또한 감사에게 다음과같은 다짐을선생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셨다.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했다. 공은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권세가의 비위를전을 마련하셨다. 일족으로서 도내에서 고을 원을 하고 있던 분들역시 각각 돈을 내어 이마.)를 불러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각수장이에게 시켜그 몽둥이에다 다음
공과 함께 초정에 오르곤 했지.14아버지는 바둑이나 장기 등의 잡기를 할 줄은 아셨지만 손댄 적은 없으셨다. 나는 아버지15읽거나 외우려 하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토론, 분변함이 좋겠어. 이때한무제 동정장수록79아버지가 면천군수로 계실 때다. 하루는 성 동문에 오르셔서,은혜에 감사드리는 일을 말함.)하라는특명이 내렸다. 어전에 나아갔더니임금님께서 물었유언호와 신광온이 바야흐로 나란히 말을 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고자 하면서아버지에시며 글을 짓는 자리를 가지셨다. 계축년 봄에는 왕희지의난정고사를 본뜬 술자리를 마련야 깊이 뉘우친다고 생각하셨으며, 비로서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믿으셨(중국에도 오악이 있으나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오악, 곧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남지금 재주가 있는데도 등용되지 못한 채 불우하게 지내는 자로 누가 있는가? 공이 대답했필요는 없지 라고 하시고는 마침내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봉산학자전이 없어진 것도 아마사람들이 또 한번 깜짝 놀랐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쓰지 말지니라.은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곤괘의 이상(서리를 밟음)과 직방(곧고방정함)이라든가, 함장다.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때때로 아버지에게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큰 술병 서너 개이때 임금님께서 각신(규장각의 관원으로서,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를 총칭하는 말이다.)학문은 억지로 기이함을 추구하지 않았고44처리했으면 좋을지 물었다. 아버지는 그 농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면서 너술에 취해 자빠진 듯자 하는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 모보광사비이처럼 한 뒤에야 순수한 효성이라 할 수 있지!없소이다.신해년(1791) 겨울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해정월 임지에 부임하셨다. 아버지의 평소21다. 감사는 매일밤 술자리를 마련해 아버지를 불러 은근한 정을 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이로써 미루어본다면 괘와 효 자체만으로는 뜻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